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난의 변 (문단 편집) ==== 협하 전투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5px-Jingnan_Campaign_%28simplified_Chinese%29140102-140110.svg.png|width=620]]|| || '''1401년 2월~1401년 10월 당시의 전황''' || 비록 동창 전투에서 성용에게 큰 패배를 당하긴 했지만, 주체의 입장에서는 전황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 없었다. 3월 무렵 정난군은 다시 남하를 시도하여 [[바오딩|보정]](保定)에 이르렀다. 이에 성용은 협하(夾河)에 진을 치고 정난군을 맞아들였다. 처음에 정난군의 장수들이 경기병을 이끌고 조심스레 성용의 군단을 공격해서 약탈했고, 이에 성용은 1,000여 명의 병사들을 보내 정난군을 추격했는데 정난군이 화살을 쏘아대자 잠시 물러났다. 하지만 진정한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성용의 황제군은 방패의 열을 맞춰 정난군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주체는 [[보병]]으로 우선 적을 막게 하고, [[기병]]이 그 틈을 타서 돌입하게 했는데, 성용은 오히려 신들린 용병술을 보이며 힘써 싸워 정난군의 장수 '''담연'''(譚淵)을 참살했다. 하지만 정난군의 '''주능'''(朱能), '''장무'''(張武)가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주체가 경기병을 이끌고 합류하자 성용군 내에서도 '''장득'''(莊得)과 '''조기장'''(皂旗張) 등이 전사했다. 이날의 승부로 전투가 결정되진 않았지만, 성용의 황제군이 조금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날 밤, 주체는 10여 명 정도의 부하들만 거느리고 황제군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성용의 군영에 가까이 접근했다. '''그런데, 눈치를 채고 보니 이미 적군에게 포위가 되어 있었다.''' 만약 여기서 '''주체가 사로잡히거나 죽었다면, 연왕 주체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는 정난군은 그대로 무너졌을 테고, [[역사]]도 많이 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주체는 조심스레 말을 이끌고, '''뿔피리를 불면서 적진을 돌파했다.''' 황제군의 다른 장수들은 '''화살 한 대 제대로 쏘지 못하고 주체를 보내주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당시 건문제가 내린 조서 때문이었다. 조서에서 건문제는 >'''"짐이 숙부를 죽였다는 책임을 지게 하지 마라."''' 라는 명령을 내렸기에, 다른 장수들도 감히 천자의 조서를 거스를 수 없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황제군은 적의 수괴를 포위하고도 화살 한 대 제대로 쏘지 못하고, 보내줄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날이 밝아 오르자 양군은 다시 전투를 벌였다. 진(辰)시[* 오전 7시부터 9시]에서부터 미(未)시[* 오후 1시부터 3시]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싸운 양군은, '''너무 지쳐서 잠시 자리에 앉아서 쉬고''' 이윽고 다시 일어나 싸움을 재개했다. 이때 정난군은 동북쪽에 있었고, 성용의 황제군은 서남쪽에 있었다. 그런데 2차 전이 재개될 무렵, 갑자기 동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성용의 부대는 바람을 곧바로 맞으며 싸우는 형세가 되었고, 기세를 탄 정난군은 좌•우 측면에서 마구 공격을 가해 성용의 황제군을 대패시켰다.('''협하 전투''') 성용은 간신히 덕주로 몸을 피했고, 위세가 등등했던 황제군의 사기도 상당히 꺾이고 말았다. 게다가, 정난군의 장수 이원(李遠)이 [[패]]현(沛縣)에서 군량과 배를 불태워 식량도 부족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